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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이야기

본문내용
선사시대

- 우리고장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와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출토된 유적을 통해서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 선사시대 집단 집터로 송암동 임정마을 집터 등이 발견되었으며 청동기시대의 묘 형태인 고인돌이 압촌동 일대에 많은 수의 분포를 보이고 있고,
- 특히 압촌동에서는 반달돌칼이 출토되었으며, 송암동 임정마을의 원형주거지, 방형주거지에서 민무늬토기편, 석기류 등 80여점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선사시대부터 서남쪽의 대촌천, 지석천, 극락강변의 야산 및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생활무대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한시대
- 삼한시대의 이 지역은 토착 농경사회가 형성되었고 50여개의 소국들이 합쳐져 강력한 부족국가를 이루었다고 위지동이전한조에 의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마한의 지역 중 광주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구사오단국과 불미지국을 들 수 있는데, 구사오단국은 장성군 진원면 일대로, 불미지국은 나주일대로 보고 있다.
- 불미지국의 경우 나주의 반남·덕산·대안·신촌에 소재한 30여개의 고분군으로 보아 나주일대로 보는 것이 가능하나, 구사오단국의 경우 반남 등지에서 보이는 고분들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다가 또한 마한이 성장해 나올 수 있는 기반인 선사시대의 지석묘군이 없어 그 추정에 무리가 따른다.
- 따라서 구사오단국의 지역을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된 우치동, 송암동, 서창동 등 극락강 일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 결국 광주가 속한 구사오단국은 극락강 대촌주변 일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한시대 각 국의 인구수는 약 5천~1만여명으로 보고 있으며, 마한의 상한연대는 지석묘 중 개석식 지석묘의 하부로 보아 기원전후가 되며, 그 하한연대는 서기 369년 백제의 근초고왕때 마한 잔여 세력을 토벌한 것으로 보아 AD 4세기 후반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 따라서 마한은 기원전후에서 4세기 후반까지 4~5백년간 지속된 것으로 본다.
백제시대
- 전남지방이 백제에 속한 시기는 백제가 마한을 정복하였다고 하는 근초고왕 24년인 369년부터 볼 수 있지만, 이 시기는 영산강 하류를 중심으로 대형 옹관묘를 축조한 토착세력인 마한집단이 잔존하고 있어 백제에 완전히 복속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백제의 군ㆍ현은 모두 147개소라 하고 있으며, 전남지역의 군ㆍ현은 중ㆍ동ㆍ남ㆍ서ㆍ북 5방의 하나인 남방 구지하성에 속하였다. 이때의 광주지역은 광주와 무등산을 중심으로 무진주ㆍ대용현(현 광산구 송하ㆍ평동ㆍ삼도), 굴지현(현 담양군 창평ㆍ고서), 수천현(현 광산구 본량ㆍ임곡)이 있었으며 당시 전남 지역에는 14군 44현의 행정단위가 있었다.
- 백제가 해상세력을 형성한 중요 거점이 된 무진주는 지금의 나주, 영암 등지와 함께 지정학상으로 볼 때 일본이나 중국과의 교류를 쉽게 할 수 있는 주요한 교통로라는 점에서 무진은 문물 교역의 요지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백제의 유물을 찾아보기 힘든 까닭은 백제의 행정ㆍ문화의 중심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백제의 영토이면서도 뿌리깊은 마한의 전통을 그대로 지켜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 광주는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의 실패로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당의 소정방은 5도독부를 설치하였다가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하자 1부 7주로 개편하였다. 문무왕 17년인 677년에 아찬 천훈이 무진도독으로 파견되었다. 신라가 통일을 이루고 군현의 행정조직을 정비한 것은 경덕왕 16년(757년)의 일이며 이때에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그 아래 군현을 관할하였다.
- 광주가 무주라고 기록된 것은「신라가 그 땅을 모두 합병하여 웅주, 전주, 무주 및 여러 군현을 설치하고 고구려의 남쪽 경계 및 신라의 옛땅을 합하여 9주를 만들었다」고 삼국사기 무진주조에 기록이 보이며, 신라 신문왕 6년에 그 이름이 나타난다. 지방조직의 핵을 이룬 9주를 살펴보면 상주, 양주, 강주, 한주, 삭주, 웅주, 연주, 전주, 무주로서 군현제는 피라밋형의 체계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다.
- 혜공왕 12년에는 경덕왕 때에 개칭된 관제가 다시 옛날처럼 복구되어 지방군현의 명칭 역시 다시 복구되었을 법 하지만 기록이 없고, 다만 신라후기에 무주ㆍ무진주로 부른 예가 있고 보면, 혜공왕 이후에는 무주가 다시 무진주로 호칭되었거나 아니면 함께 부르게 되었던 듯 하다.
- 무주는 근처 3현인 남평, 나주일부, 창평을 직할한 전남지역의 행정 중심지였다. 이 당시 최소의 지방행정구역은 촌이었으므로 무주에도 몇 개의 촌이 있었을 것이다. 촌은 대략 10호 가량의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혈연집단이 거주하는 자연부락을 기준으로 편성된 것이었다.
- 통일신라는 군사조직으로 궁성을 호위하는시위부와 9서동의 중앙군 이외에도 5주서 및 삼변수, 그리고 지방군을 두었다. 십정이 바로 지방군을 뜻하며 정은 군영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각 지방요지에 설치한 지방군단이었다. 그 십정중의 하나가 미다부리정이고 무주에 직속되었던 남평에 있었으며 군단의 표지는 흑색금이었다. 한편 무주의 전신은 미다부리정이 아니었나 하는 추론도 있다.
- 미다부리정이 곧 백제의 미다부리현에 설치되었으며「미동」이나「미다」는「무도」,「물독」이란 말의 차음표시로 보아왔다. 지명의 기원을 이룬 금물제지가「남광산왕리」에 있다는 점이나 무등산의 백제 고성지가「동재십리」라는 점으로 보아 미동부리ㆍ미다부리정ㆍ무진주등은 현웅현 구치가 있던 남평이 아니라 무진주를 둔 금물제지일대, 곧 현재의 광주땅에 있었다고 봄직하다.
고려시대
- 고려 태조 19년 견훤의 아들 신검이 항복함으로써 후백제가 멸망하였으며, 태조 23년(940년)에 무주를 광주로 개편하고 동시에 도독부를 두었다. 그 후 성종 14년(995년)에 관제 개혁을 실시 전국을 3경ㆍ4도호부 ㆍ10도로 나누는 동시에 12주목을 12주절도사로 변경하였고, 이 개혁으로 전라남도를 해양도라 했으며, 5도호부중 안남도호부를 낭주에 설치하였고 광주에는 자사를 두었다.
- 당시 해양도에는 1도호부에 14주 62현이 있었는데 전주ㆍ승주에는 절도사가 있었고, 자사를 둔 곳은 담주(담양)ㆍ패주(보성)ㆍ광주의 3주였다. 그러다가 현종 9년에 다시 행정구역을 재편하여 제도의 안무사를 폐지하고 전국에 4도호부ㆍ8목ㆍ56지주군사ㆍ28진장ㆍ20현령을 두었다.
- 이때 광주는 강등되어 해양현이 되었다. 그후 고종 46년(1259년)에 해양현에서 지익주사로 승격되고 뒤에 목으로 승격되지만, 충선왕 2년(1310년) 광주목에서 강등되어 화평부가 되었는데, 그 까닭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당시 광주에는 토호의 세가 강하여 이를 억제하고자 취한 조치로 추측되며, 그 후 공민왕 11년(1362년)에 화평부를 무진부로 개칭하였다가 1374년(공민왕 23)에 무진부를 다시 광주목이라 했다.
후삼국시대
-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서남해안의 방수패장으로 있다가 진성여왕 6년에 무진주를 점거하고 부근 군현을 빼앗아 완산주(전주)에 진군하여 도읍을 삼고 후백제왕이라 자칭했다.
- 그때 북방의 궁예도 강원도의 대부분을 정벌하고 도읍을 개성으로 옮긴 뒤 경기도를 정복, 혜공왕 5년에 후고구려왕이라 자칭하였다. 궁예는 칭왕 이후 3년에 국호를 마진이라 하다 다시 태봉으로 고쳤다.
- 또 당시 궁예에 투항하였던 왕건은 상주 등 30여 주현 및 충남 공주를 평정하여 궁예에 귀부시키고, 해상을 통해 후백제 견훤을 공격하여 나주등 10여군을 공략한 후 나주에 진을 쳤다. 삼분된 신라를 두고 후백제와 태봉(마진)이 광주와 나주를 경계로 그 패을 겨루었다.
- 후백제 시대의 광주는 나주가 고려의 전신인 태봉의 전초지인 것처럼 후백제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견훤은 도읍을 옮긴 뒤 광주성을 아들 용검과 사위 지훤에게 지키게 했다.
조선시대
-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신흥 무인 집단으로 성장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사대부계층과 연합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한 것이 1392년이다. 이때 조선은 고려의 지방제도를 답습하지만 태종대에 개편 작업에 들어가 성종대에『경국대전』의 완성과 더불어 중앙집권적인 제도가 완비된다.
- 1393년(태조2년) 광주목에는 나주목과 함께 계수관을 두었으며, 광주목에 속한 군현으로는 2도호부(순천, 담양), 2군(보성, 낙안), 7현(고흥, 능성, 화순, 동복, 옥과, 진원, 창평)이었다. 태조 6년(1397년)에는 전라도의 군을 전담하는 병마도절제사영을 광산구 영동에 두었다가 태종17년(1417년)에 도강현(현재 강진병영)으로 옮겼다.
- 광주지역의 읍호는 여러 차례 변경되었는데 세종 12년 읍인 노흥준이 목사 신보안을 구타하였다는 죄과로 목을 군으로 강등하여 무진군이라 개칭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문종 원년에 다시 복칭되었다가, 성종 20년 광산현으로 강등되고, 연산군 7년에 복호되었으며, 그 이후에는 인조, 숙종 대에도 이와 비슷한 불미한 일로써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는 사례가 있었다.
- 영조 33년(1757년) 광산현에서 다시 광주목으로 되면서 41개의 면을 두었다. 지금의 남구지역은 부동방면, 공수방면, 효우동면 등에 속하고 대촌지역은 서면 방면의 여러 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광복이후
-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주둔 미군에 의한 군정이 2년 11개월 동안 실시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광주부는 1949년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광주시로 개칭되었다.
- 1952년에는 그동안 6. 25동란 발발로 미루었던 시의원 선거를 치르고 5월 5일 첫 광주시의회를 통해서 시장이 선출되었다. 또한 1955년 7월 1일에는 현재 남구에 속하는 효지면 전역을 포함하여 광산군 서방·석곡·극락·효지면이 편입됨에 따라 광주시의 면적이 종전 19㎢에서 155.01㎢로 늘어나 무려 8배 이상 확장되었다.
- 2년 후인 1957년 11월 6일에 시역을 재 확장하여 광산군 석곡면 잔여와 지산·서창·대촌면 및 담양군 남면의 일부 편입으로 279.25㎢로 시역이 늘어났다. 그 뒤 1963년에는 서창·대촌출장소가 다시 광산군에 환원되어 시역은 214.92㎢로 좁혀들고 6개 출장소와 45개동이 되었다.

- 한편 1961년 3월 10일에는 현재의 남구지역을 관할하는 남부출장소가 설치되어 사구동, 서동, 양1ㆍ2동, 월산동, 농성동, 백운동, 봉주동, 효덕동,
송암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 1973년 7월 1일 구제가 실시됨에 따라 종래의 4개 출장소를 폐지하고 석곡ㆍ지산의 2개 출장소만 존치 시키는 한편 동구와 서구로 나누어 구제를 실시함에 따라 우리 남구는
남부ㆍ서부ㆍ지산출장소가 통합하여 서구에 포함되었다.
- 이후 1980년 4월 1일 북구와 북구보건소를 신설하고 곧 이어 석곡ㆍ지산출장소를 폐지할 때에도 우리 남구는 서구에 포함되었고, 1986년 11월 1일 법률 제3808호로ㆍ광주직할시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됨으로써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그 법적지위가 승격됨과 동시에 기존의 각구청도 기초자치단체로의 법인격을 부여받게 되었다.
- 1988년 1월 1일 법률 제3963호의 공포로 송정시와 광산군 전역이 다시 광주직할시에 편입됨으로써 시역은 500.73㎢로 크게 늘어났다. 1995년 1월 1일 본격 지방 자치제의 실시를
앞두고 자치제의 정신에 따라 중앙집권적인 의미의 “직할시”의 명칭을 “광역시”로 개칭하고, 같은 해 3월 1일 남구청이 개청(법률 제4802호) 되었다.
- 같은 해 4월 20일에는 광산구로부터 대촌동이 편입되었으며, 이후 ’98년 10월 1일 광주광역시 남구조례 제 175호에 의해 행정운영동의 설치에 관한 개정조례에 따라 사구동, 서1동,
서2동을 사직동으로 통·폐합하여 행정동 20개 동이 18개 동으로 변경되었다.
- 2000년 7월 1일에는 광주광역시 남구조례 제 247호에 의해 소규모 동인 월산1동, 월산2동, 월산3동을 월산동으로 통ㆍ폐합하여 행정동 18개 동이 16개 동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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