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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안내

양림동

  • 연혁
    • 양림동은 사직산과 양림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동남사면에 자리잡은 전통 주거지역이다. 일제강점기 때 선교사가 들어와 여학교와 병원을 개설하여 세칭 서양촌으로 불려졌다. 동명의 유래는 버드나무 숲으로 덮여 있는 마을이라 해서 양촌과 유림을 합해 양림이라 칭했다. 양림동은 동쪽으로 광주천을 경계로 동구 금동, 서쪽으로 백운동, 남쪽으로 방림동, 북쪽으로 사직동과 접해 있다. 양림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1914년 4월 1일 부동방면의 방림리, 원지리, 신사리의 각 일부 지역을 합해 효천면 양지리가 되었다. 당시 이 지역에는 「강번」, 「뒷동산」,「흙구뎅이」란 마을이 있었다. 1935년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되면서 광주부 양림정이 됐으며, 1946년 양림1, 2구로 분동하여 양림1구를 지석동, 양림2구를 양학동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1947년 8월 15일 지석동과 양학동을 합쳐 양림동으로 개칭하고, 1961년 3월 10일 광주시 동부출장소의 관할이 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동구 관할이 되었다. 1980년 4월 1일에 다시 서구 관할로 편입된 후 1995년 3월 1일 광주광역시 서구에서 남구로 분구 되었으며 2003년 11월 10일 동간 경계조정으로 방림1동에서 관할하던 대남로 북쪽의 방림동 지역을 편입하였다.
  • 지역특성
    • 광주·전남 기독교 선교의 발상지로 이국적 정취를 자아내며, 6개의 대형교회가 소재하고 있어 동민의 65%가 교인으로 종교촌의 성격을 띄고 있음.
    • 광주의 근대화가 시작된 곳으로, 당시의 중요한 역사문화 자료와 건축물 등이 산재해 있어 근대역사문화마을로 불리며 광주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자리 잡음.
    • 문학과 예술의 마을로 불리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신비로움을 자아해 낸다.
    • 도시재생 뉴딜사업으로 주민 편의시설 구축과 관광 인프라 확충으로 더욱 살기 좋은 마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역특성양림동 면적 및 인구수 (계/남/여), 세대수, 행정조직(통/반), 동직원현황에 대한 상세리스트 입니다.
    면적 인구 세대수 행정조직 동 직원
    현황
    0.63 7,003 3,202 3,801 3,164 16 78 14

방림1동

  • 연혁
    • 방림1동은 치마봉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는 능선을 두고 동서편에 자리잡고 있다. 능선의 동쪽 기슭에는 광주천을 따라 주거 밀집지역이 형성되어 있다. 동명의 유래로는 광주천변 제방을 따라 울창한 버드나무 숲이 있어 방림이라 칭했다는 설과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방제골」,「방역골」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방림1동은 동쪽으로 동구 학동, 서쪽으로 봉선동, 남쪽으로 동구 용산동, 북쪽은 양림동과 각각 접해 있다.
  • 지역특성
    • 천변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로 동서로 순환도로인 대남대로와 남광주고가도로가 있어 외부로의 교통은 편리하며, 주택과 아파트 복합형태의 도시지역임.
    지역특성방림1동 면적 및 인구수(계/남/여), 세대수, 행정조직(통/반), 동직원현황에 대한 상세리스트 입니다.
    면적 인구 세대수 행정조직 동 직원
    현황
    0.59 6,640 3,167 3,473 2,931 15 56 11

방림2동

  • 연혁
    • 방림2동은 남구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광주천을 따라 동구의 학동과 서쪽으로 봉선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중앙에 치마봉을 따라 남북으로 산의 능선이 흐르고 있다 동명의 유래는 방림1동과 거의 유사하고 다만 방림2동 지역은 밖방림, 밭방림, 늘리리마을이라 불렸던 새방림이었다. 1935년 4월 1일 광주읍 확장으로 효천면 방림리에서 광주읍 방림정으로 편입되고, 1946년 4월 15일 지명개정에 따라 방림정에서 방림2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 지역특성
    • 광주천, 치마봉, 청년동산 등 도심 속 자연환경이 인접해 있고, 방림 근린공원 조성, 도시재생 사업 등 도시 숲 확보와 세대공감 마을문화 거점 확보를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음.
    • 치마봉 능선을 따라 동쪽에는 단독주택이 주로 위치하고 서쪽에는 아파트촌이 형성되어 있어 생활문화 양분화 현상에 대비한 주민네트워크 형성 및 공동체 활성화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음.
    지역특성방림2동 면적 및 인구수(계/남/여), 세대수, 행정조직(통/반), 동직원현황에 대한 상세리스트 입니다.
    면적 인구 세대수 행정조직 동 직원
    현황
    0.51 8,891 4,201 4,690 4,078 21 95 11

봉선1동

  • 연혁
    • 봉선동은 서쪽 자생잇봉으로부터 남쪽을 돌아 동쪽 물동지산까지 병풍처럼 둘러 있는 능선의 북사면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일찍이「서당골」,「부처골」,「샛골」,「한대골」,「방죽골」의 시냇물을 받아 조봉제와 유안제에 담아 농사를 짓던 농촌이었으나 1980년대에 시작된 택지조성사업으로 신흥아파트가 들어서 당시의 마을들이 거의 사라졌다. 동명의 유래는 조봉리와 이선리의 이름을 따서 봉선이라 칭했으며,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후기에 옹정면(翁井面)에 속했고 조봉촌(鳥鳳村), 이선촌(伊仙村), 불노촌(不老村)이 있었다. 구한말에는 광주군 도천면(陶泉面) 옹정리(翁井里), 이선리, 용정리(龍井里), 조봉리(朝鳳里), 불노리, 신기리(新基里)가 있어 1914년 4월 1일 위의 도천면과 부동 방면의 방림 일부, 유안, 운용리가 합쳐져 효천면 봉선리가 되어 처음으로 봉선이라는 이름이 나타났다. 이후 1935년 4월 1일 광주군 효천면과 지한면(池漢面)이 합병되어 孝池面 鳳仙里가 되었고, 1955년 7월 1일 광주시역의 확장에 따라 광산군 효지면이 광주시에 편입되면서 광주시 봉선동이 되어 공식적으로 봉선동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다시 1957년 봉선동과 주월동이 합동되어 봉주동이 되었다가 1970년 방림동이 분동되면서 봉주동중 법정동 봉선동은 방림2동 관할이 되었다. 1990년 1월 1일 인구증가로 방림2동에서 봉선동으로 분리 독립했다가 1995년 3월 1일 광주광역시 서구에서 남구로 분구되면서 봉선동이 봉선1, 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 지역특성
    • 대단위 아파트단지와 구획정리된 단독주택이 조화된 전형적인 주거 지역으로 상업이 발달하고, 교육·의료·종교시설이 비교적 잘 분포된 곳이다.
    지역특성봉선1동 면적 및 인구수(계/남/여), 세대수, 행정조직(통/반), 동직원현황에 대한 상세리스트 입니다.
    면적 인구 세대수 행정조직 동 직원
    현황
    0.83 13,460 6,292 7,168 6,677 29 124 14

봉선2동

  • 연혁
    • 1995년 3월 1일 광주광역시 서구에서 남구로 분구되면서 봉선동이 봉선1, 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 지역특성
    • 아파트 집단거주(95%) 및 신개발 지역으로 인구밀도가 높은 주거지역으로, 쾌적한 주거환경과 우수한 교육여건으로 주민의 의식과 생활수준이 높은 도시지역이다.
    지역특성봉선2동 면적 및 인구수(계/남/여), 세대수, 행정조직(통/반), 동직원현황에 대한 상세리스트 입니다.
    면적 인구 세대수 행정조직 동 직원
    현황
    1.80

    28,848

    13,497 15,351 9,998 32 182 14

사직동

  • 연혁
    • 사직동은 사직산에서 성거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1978년에 확장된 중앙로를 중심으로 구성로와 독립로를 경계로 광주공원, 시민회관, 사직공원이 있어 많은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으며 광주향교, 현충탑, 구동 실내체육관등이 있다. 특히 구서동은 서당골, 서당동의 옛이름을 따라 서동이라 했다. 사구동은 조선후기 이 지역은 사직촌과 교촌이 있었다. 1931년 4월 1일 광주읍 구강정과 사정이 되었고, 1946년 4월 5일 일제의 잔영을 없애기 위해 구강정을 구동, 사정을 사동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1947년 8월 15일 구동과 사동으로 개칭하였고 1952년 사동과 구동을 합쳐 사구동 이라 하였다. 1961년 3월 10일 출장소제(8개 출장소 : 중 · 동 · 서 · 남 · 북 · 지산 · 대촌) 실시에 따라 남부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구제(동구: 중 · 동 · 북구출장소, 서구: 남 · 서 · 지산출장소) 실시로 서구 관할이 되었다. 서동은 조선후기 광주군 공수방면에 속했으며 당시 이곳에 교촌이 있었다고 한다. 1941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 · 폐합에 따라 공수방면의 상촌, 교촌, 덕촌리와 도천면의 교사리였으며, 1923년 4월 1일 광주면 확장에 따라 광주면 교사리가 되었고, 1931년 4월 1일에 광주(읍의승격) 서정이 되었고, 1935년 10월 1일 광주부(부로 승격) 서정, 이후 1947년 8월 15일 서 · 동으로 호칭 · 개시되었으나 1948년 4월 1일 서동이 서동 1구 동회와 서동 2구 동회로 잠시 달리 불리다가 다시 1952년 동회제를 폐지하고 서동으로 불려졌다. 1957년 12월 2일 본청직할의 서동이 됨. 1961년 3월 10일 8개출장소제 실시로 남 부출장소 관할로 있다가 1970년 6월 29일 서동 서1, 2동으로 분동되었다. 1986년 11월 1일 광주시의 직할시 승격에 따라 전라남도와 분리되었고, 1995년 3 월 1일 서구의 분구로 광주광역시 남구관할이 되었다. 1998. 10. 1일자 소규모동 통 · 폐합으로 인하여 통합동이 되었으며 기존 사구동과 서1동, 서2동의 3개동이 사직동으로 통합되어 청사는 구서1동(중앙로95번길 20) 사무소 위치해 있다가, 2000년 8월 동사무소 기능전환에 의해 동의 기능이 "주민 자치센터화" 되면서 보다 효율적인 기능전환을 위해 구 서2동사무소(서당골길 13)에 위치해 있다가 2007.6.15일자로 쾌적한 사무환경과 질좋은 대민서비스를 위해 새로운 청사(중앙로95번길 14)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지역특성
    • 광주의 오랜 역사의 문화자원과 향교문화 등을 간직하고 있는 역사문화의 중심 마을로 도심 속 광주공원과 사직공원을 동시에 품고 있는 생태마을임.
    • 단독주택(76.5%) 및 65세 이상 인구(25.9%) 비율이 높은 구도심 주거지역이나 현재 사동 일원으로 도시재생 뉴딜사업, 서동 일원으로 주택재개발사업이 추진중에 있어 주민편의 환경정비 등 생활인프라 확충과 정주여건이 크게 개선될 것으로 기대됨.
    지역특성사직동 면적 및 인구수(계/남/여), 세대수, 행정조직(통/반), 동직원현황에 대한 상세리스트 입니다.
    면적 인구 세대수 행정조직 동 직원
    현황
    0.61 5,215 2,693 2,522 2,967 22 104 10

월산동

  • 연혁
    • 월산동(月山洞)은 수박등(105m)에서 덕림산(94m)으로 이어지는 남북방향의 능선을 두고 양쪽에 자리잡고 있다. 과거에는 덕림산이 시가지에서 가깝고 전망도 아름다운 곳이라 광주시민들의 화전놀이터였기에 새장구소리가 흥겹게 울렸다고 한다. 동명의 유래는 덕림산이 달덩이처럼 둥글고 덕스러울 뿐 아니라 달맞이 하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옛날부터 그 기슭에 있는 마을을 월산(月山) 또는 '도군머리'라 칭했다. 동의 연혁으로는 조선후기에 이곳은 광주군 도천면(陶泉面)에 속했고, 구한말에는 광주군 도천면(陶泉面) 월산리(月山里)·신촌리(新村里)에 속했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천면 월산리·신촌리·염주리(念珠里)와 군분(軍盆)면 연변(延邊)리·신흥(新興)리 각 일부가 효천면 주월(珠月)리가 되었다. 당시 이 지역에는'띠밭', '수박동(수복촌)', '신촌', '원터', '이태'마을등이 있었는데, 월산에서 서동으로 넘는 고개를'사망단재'라 했으며 이곳에는 서낭당이 있었다. 1935년 4월 1일 광주읍 확장으로 광주면 덕림리, 극락면(極樂面) 신예리(新禮里), 효천면(孝泉面) 주월리가"월산정(月山町)"으로 불리다가 1947년 8월 15일 월산동(月山洞)으로 개칭되어 처음으로 월산동(月山洞)(月山洞)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1948년 4월 1일에 월산동회(月山洞會)로 잠시 바뀐 후 1952년 동회제가 폐지되면서 다시 월산동이 되었다. 1961년 3월 10일에 출장소제가 실시됨에 따라 남부(南部)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70년 6월 29일에 월산1, 2, 3동으로 분동되었다. 1973년 7월 1일에는 구제 실시에 따라 남부·서부·지산출장소를 통합한 서구 관할이 되어 1979년 5월1일 월산4동을 분동시켰다. 1995년 3월 1일 서구 분구와 함께 광주광역시 남구 관할로 편입되었으며, 2000년 7월 1일 월산1, 2, 3동이 월산동으로 통합된 후, 2000년 8월 1일 주민자치센터가 개소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지역특성
    • 덕림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구 시가지로 재래식 주택이 많아 7,80년대의 풍경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남구에서 타 구 (북구, 동구)로의 이동이 쉬운 지리적 이점때문에 대부분의 지역이 주거환경개선사업 및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되어 남구지역 발전의 전초기지로 부각됨.
    • 옛스러움이 잘 묻어나고 골목길이 많은 특성을 이용하여 담벼락 벽화사업이나 마을박물관조성사업이 진행되었으며, 달뫼커뮤니티센터가 건립되어 다양한 활동의 장을 통한 젊은세대의 유입이 많아질 전망이다.
    지역특성월산동 면적 및 인구수(계/남/여), 세대수, 행정조직(통/반), 동직원현황에 대한 상세리스트 입니다.
    면적 인구 세대수 행정조직 동 직원
    현황
    0.93 8,898 4,555 4,343 4,611 34 120 13

월산4동

  • 연혁
    • 수박등을 가슴에 안고 발전한 월산4동은 급속한 도시의 팽창과 인구 증가로 1979년 5월 1일 월산2동으로부터 분동되었으며, 1985년 11월 1일 월산5동이 분동됨으로써 수박등을 정점으로 동쪽은 월산2동 서쪽은 월산4동과 월산5동이 위치하게 되었으며, 1995년 3월 1일 광주광역시 서구 관할에서 분구와 함께 남구 관할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지역특성
    • 전형적인 일반주거지역으로 단독 주택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최근 도시팽창과 복개도로의 개통으로 간선도로망을 따라 상가가 형성되고 있다. 제1순환도로가 동 중심을 통과하고 간선 및 지선 도로망이 잘 연결되어 있어 교통이 편리하며 상설시장이 동 중앙에 위치하고 골목길이 잘 정비되어 비교적 주거 생활이 편리한 지역이다.
    지역특성월산4동 면적 및 인구수(계/남/여), 세대수, 행정조직(통/반), 동직원현황에 대한 상세리스트 입니다.
    면적 인구 세대수 행정조직 동 직원
    현황
    0.57 8,502 4,373 4,129 4,799 25 108 13

월산5동

  • 연혁
    • 월산5동은 월산4동으로부터 분할되었으며, 월산동중 가장 나중에 분할된 동이다. 1985년11월1일에 월산4동으로부터 분동되어 1995년3월1일에 광주광역시 서구의 분구와 함께 남구관할로 이관 되었으며, 2000년8월1일 동기능 전환으로 주민자치센터를 설치하여 운영되고 있다. 월산(月山)은 달맞이 하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옛날부터 월산마을 또는 도군머리라 칭하였다. 또 이곳을 수박등이라 하고 능선의 남쪽아래가 월산5동으로 활룡천의 상류 개천이 복개되었으며, 능선을 횡단하는 수박등길을 개설함으로써 도심의 접근선이 크게 증대된 동이다.
  • 지역특성
    • 월산5동은 월산4동으로부터 분할되었으며, 월산동중 가장 나중에 분할된 동이다. 1985년11월1일에 월산4동으로부터 분동되어 1995년3월1일에 광주광역시 서구의 분구와 함께 남구관할로 이관 되었으며, 2000년8월1일 동기능 전환으로 주민자치센터를 설치하여 운영되고 있다. 월산(月山)은 달맞이 하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옛날부터 월산마을 또는 도군머리라 칭하였다. 또 이곳을 수박등이라 하고 능선의 남쪽아래가 월산5동으로 활룡천의 상류 개천이 복개되었으며, 능선을 횡단하는 수박등길을 개설함으로써 도심의 접근선이 크게 증대된 동이다.
    • 대남로를 경계로 수박등 산하의 고지대와 황룡천 복개도로 주변의 저지대로 경사가 다소완만한 지형이다. 수박등을 가로 지르는 수박등로가 개설되어 많은 차량이 이용하고 있다. 대남로는 동남쪽의 백운광장에서 서북쪽의 버스터미널을 연결하는 시의 간선도로로 우리동의 중앙부근을 관통하여 사무실, 병의원, 식당, 상가 등이 자리잡았고, 도심 및 신도시와의 접근성이 좋다.
    • 소규모 다세대 주택과 단독주택지역으로 30여년전에 도시구획정비가 완비되었고 중앙 행정기관산하의 통계청 광주전남사무소가 있다.
    • 월산근린공원은 지역주민들이 애용하는 산책명소이며 1999년도에 남구노인 복지회관이 준공되어 많은 노인들이 이용하고 있다.
    • 인근에는 무등시장이 황룡천 복개도로개설로 형성되어 점차 확대되고 우리동까지 시장의 일부로 형성되고 있다. 특히 먹거리 골목이 많이 형성되어 도시기능이 고루 갖춘 쾌적한 동이며 구획정리로 개설된 이면도로가 거주민과 방문객의 주정차를 편리하게 해줌으로써 도시의 활기를 돕고 있다. 또한 주민의 마음이 너그러우며 자족과 나누는 품성이 있어 이웃간의 정도 많은 동네다.
    지역특성월산5동 면적 및 인구수(계/남/여), 세대수, 행정조직(통/반), 동직원현황에 대한 상세리스트 입니다.
    면적 인구 세대수 행정조직 동 직원
    현황
    0.44 6,430 3,208 3,222 3,551 15 71 11

백운1동

  • 연혁
    • 백운동은 수박등 남쪽능선과 까치고개 건너 비석등(쥐불등: 80m) 남쪽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봉선동과 주월동에서 내려온 시냇물이 만나는 곳으로『벽도교』,『진다리』가 설치되어 있었고 『동애붓들』가의 네거리 농촌이었다. 동명의 유래는 밝고 따뜻한 곳이라는 뜻으로 『난지실』로 불려오다가 한자명으로 바꿀 때 벽도(碧桃)·백운(白雲)이 되었다. 백운1동(白雲1洞)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후기에 도천명(陶泉面)에 속했고, 구한말에는 도천면 백운리 였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천면의 백운·신기(新基)·옹정(甕井)·신사(新社)리 각 일부와 부동방(不動坊)면의 벽도리가 합하여 효천면(孝泉面) 벽도리가 되었다. 1923년 4월 1일 광주읍의 확장으로 효천면 벽도리와 주월리(珠月里)가 백운정 (白雲町)이 되었다. 1947년 8월 15일에 백운동으로 개칭 되면서 (백운동) 의 호칭이 시작 되었고, 1948년 4월 1일부터 백운동회(白雲洞會)로 잠시 불리다가 1952년 동회제(洞會制) 폐지에 따라 본래의 백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되돌아 왔다. 1961년 3월 10일 출장소제 실시로 남부 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구제(區制)실시로 남부, 서부, 지산 출장소를 통합한 서구 관할로 되었다. 1985년 11월 1일 백운동이 백운1, 2동으로 분동되었고, 1986년 11월 1일 광주시의 직할시 승격과 함께 광주직할시 서구 관할에서 1995년 3월 1일 서구의 분구와 함께 광주광역시 남구 소관으로 변경이 되었으며, 1979년 9월 7일에 준공된 동사무소 청사의 노후로 인한 안전과 주민자치센터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2006년 3월 27일 신 청사를 신축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지역특성
    • 광주광역시 서남부 방면의 관문이고 2011년부터 휴먼시아 아파트, 2014년에는 우방아이유쉘 아파트 입주로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지역특성백운1동 면적 및 인구수(계/남/여), 세대수, 행정조직(통/반), 동직원현황에 대한 상세리스트 입니다.
    면적 인구 세대수 행정조직 동 직원
    현황
    0.49 12,237 5,755 6,482 5,190 21 105 13

백운2동

  • 연혁
    • 조선후기 광주군 도천면 관할로부터 시작하여 구한말 도천면 백운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백운2동은 수많은 부침을 겪었다. 봉선동과 주월동에서 내려온 시냇물이 만나는 곳으로 ·벽도교·진다리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1910년 광·목간 신작로가 나면서 전남 서남부 방면의 관문 역할을 수행하였다. 60~70년대의 근대화를 거치면서 1970년대 로터리를 만들고, 1989년에는 순환도로의 교통체증을 해소하기 위해 고가도로가 개설되었다. 백운2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1985년 11월 1일 백운동이 백운1, 2동으로 분동되었고, 1986년 11월 1일 광주시의 직할시 승격과 함께 광주직할시 서구로 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 서구의 분구에 따라 광주광역시 남구 소관으로 경계 조정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지역특성
    • 광주 서남방의 중심지이며 교통의 요지이며 백운광장 고가도로 철거와 도시철도 2호선 건설로 새로운 번영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지역특성백운2동 면적 및 인구수(계/남/여), 세대수, 행정조직(통/반), 동직원현황에 대한 상세리스트 입니다.
    면적 인구 세대수 행정조직 동 직원
    현황
    0.44 6,783 3,360 3,423 3,634 16 77 12

주월1동

  • 연혁
    • 주월동은 진월동의 금당산(304m)에서 옥녀봉(220m)을 거쳐 노인고개(신암고개), 짚봉산(127m) 까지 북쪽으로 향한 능선의 동사면에 자리잡고 있다. 주월마을은 봉선동과 진월동에서 발원하는 극락천(極樂川)이 만든'건지봇들'논을 일구는 농촌이었는데, 70∼80년대의 도시화를 거치면서 신흥주택단지와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발전하였다. 동명(洞名)의 유래는 1914년 염주리(念珠里)와 월산리(月山里)의 이름을 따서 주월리(珠月里)라 칭했다. 주월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후기에 이 지역은 광주군(光州郡) 도천면에 속했고, 구한말에 도천면 옹정리(甕井里)·월산리(月山里)가 있었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천면 염주·월산·신촌리와 군분(軍盆)면 연변(延邊)리·신흥리 각 일부가 효천면 주월리가 되었다. 1935년 4월 1일 주월리 일부가 광주읍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지한면과 효천면이 병합되어 신설된 광주군 효지(孝池)면 관할이 되었다.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에서 광주읍이 광주부(光州府)로 승격 독립함으로써 광주군의 다른 지역과 함께 광주시로 편입됨과 동시에 광주시 주월동이 되어 「주월동(珠月洞)」이라는 공식 명칭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1957년 12월 1일에는 주월동과 봉선동을 합하여 봉주동사무소를 설치하면서 행정을 시행하였다. 1961년 3월 10일 남부출장소 관할로 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로 주월동은 봉주동에서 분리되면서 봉선동의 장산(長山)·이선(二仙)·옹정(甕井)마을을 편입시켜 서구관할이 되었다. 1985년 11월 1일에는 인구팽창과 도시의 확장으로 주월1?2동으로 분동하였고, 1995년 3월1일에 서구에서 분구되어 남구관할이 되었으며, 2003년 11월 10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주월1동 일부지역이 봉선1동에 편입되었다.
  • 지역특성
    • 국도 1호선인 서문로를 중심으로 좌우측에 위치하며, 기존의 도심철도 공원화 사업으로 푸른길공원이 조성되어 있음.
    • 서측에는 금당산이 있어 많은 주민들이 등산이나 여가활동 등을 하는 생활공간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초중고교 등 학교시설이 많이 위치해 있는 지역임.
    • 신축 아파트 입주 등으로 앞으로 인구유입이 예상되며 백운광장 뉴딜사업의 일환으로 백운광장 푸른길 브릿지 조성사업이 시행되면 향후 교통의 중심지 및 지역경제 활성화를 이끄는 발전가능성이 큰 지역이라 할 수 있음.
    지역특성주월1동 면적 및 인구수(계/남/여), 세대수, 행정조직(통/반), 동직원현황에 대한 상세리스트 입니다.
    면적 인구 세대수 행정조직 동 직원
    현황
    1.27 21,923 10,627 11,296 9,635 42 197 14

주월2동

  • 연혁
    • 주월2동은 진월동의 금당산 옥녀봉아래 노인고개에서 짚봉산 (127m)까지의 북쪽으로 향한 능선의 동사면에 자리잡고 있다. 신기마을, 원골과 월산마을 앞 군분천을 중심으로 건지봇들 논을 일구는 농촌이었는데 70년대 도시화의 물결속에 세계은행 차관주택단지가 들어서면서 활발하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조선후기 광주군 도천면에 속하면서 1955년 광산군 효지면이 광주시로 편입 광주시 주월동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85. 11. 1에는 주월1·2동으로 분동을 하면서 백운동(653지번), 월산동1047~1048지번) 일부를 편입시켜 주월2동으로 행정을 실시하였다. 1995. 3. 1에는 서구의 분구에 맞추어 광주광역시 남구관할이 되고 같은 해 12월30일 백운(651-652번지) 일부를 편입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지역특성
    • 79년 세계은행 차관 주택단지로 조성된 집단주거지역으로 짚봉산(127m)까지의 북쪽으로 향한 능선의 동사면에 자리하며 대남로와 회재로(풍암지구 진입도로)가 인접하여 교통이 편리함.
    • 무등시장 주차환경개선사업을 통해 주차빌딩을 신축하여 이용 고객들의 편의성을 증가하고, 생활문화센터 증축을 통해 전통시장 활성화에 기여.
    지역특성주월2동 면적 및 인구수(계/남/여), 세대수, 행정조직(통/반), 동직원현황에 대한 상세리스트 입니다.
    면적 인구 세대수 행정조직 동 직원
    현황
    1.16 8,022 3,981 4,041 4,033 18 88 12

진월동

  • 연혁
    • 진월동(眞月洞)은 북동쪽으로 제석산, 북서방면의 금당산(304m)로 둘러쌓여 있으며 과거 급속한 개발이 있어 인구가 3만에 이르는 동이다. 원제(元堤)마을 등지에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여겨지며, 조선후기에는 이 지역이 광주군 효우동(孝友洞)면에 속했고 당시 진제(眞堤)마을, 옹기(甕器)마을 등이 있었다. 동이름인 진월(眞月)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당시 효우동면 중 진제, 점촌, 구림리 일부와 도천면 월전(月田)리가 합해져 광주군 효천면의 진월리가 되었다. 1935년 4월 1일 효천면(孝泉面)과 지한면(池漢面)이 합해진 효지면(孝池面)의 진월리가 되었다. 1935년 10월 1일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되어 광주군과 독립되면서 광주군의 나머지 지역은 광산군(光山郡)으로 개칭되었고, 이때 이 지역은 광산군 효지면에 속하였다. 1955년 광주시의 권역확장에 따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진월출장소(眞月出張所) 관할의 진월동이 되었으며, 1957년 행정운영동 축소에 따라 4개의 법정동(진월동, 노대동, 덕남동, 행암동)을 관할하는 효덕동이 설치되었으며, 이는 효천면(孝泉面)과 덕남동(德南洞)의 이름을 딴 것이였다. 1961년 3월 1일 출장소제 실시에 따른 남부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73년 7월 1일 구제(區制) 실시로 남부, 서부, 지산출장소를 관할한 서구에 속하였다.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되고, 1995년 1월 1일 광주광역시로 명칭변경된 이후, 1995년 3월 1일 서구에서 남구가 분구되어 효덕동(孝德洞)이라는 행정동명을 사용해왔다. 인구과대 밀집동으로 행정수요가 가중됨으로써 행정의 신뢰성을 제고하고 주민편익을 증진하기 위해 2021년 7월 26일 진월동과 효덕동(법정동:노대·덕남·행암동)으로 분동되었으며 “광주광역시 남구 진월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지역특성
    • 전남의 서남부 지역을 연결하는 국도 1호선이 동의 중심부를 관통하고 있으며 제2순환도로를 비롯한 광주대와 전남 화순군을 연결하는 도로의 발달 등 사통팔달의 교통요충지로, 도심지역을 중심으로 아파트 밀집군을 이루면서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여 남구 관내에서는 인구 규모가 가장 큰 동으로 발전되었다.
    • 또한 종합대학교인 광주대학교를 비롯하여 초등학교 3개교, 중학교 3개교, 고등학교 3개교 등 많은 학교가 집중되어 있어 청소년들의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이다.
    지역특성진월동 면적 및 인구수(계/남/여), 세대수, 행정조직(통/반), 동직원현황에 대한 상세리스트 입니다.
    면적 인구 세대수 행정조직 동 직원
    현황
    2.7 28,237 13,098 15,139 11,478 40 207 14

효덕동

  • 연혁
    • 효덕동(孝德洞)은 남쪽의 분적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대촌천 극락천 수춘천의 발원지가 되며, 남구에서 세 번째로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노대동, 덕남동과 행암동 일부는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전형적인 농촌 지역의 자연부락단위 발전형태를 띠고 있으며, 행암동을 중심으로 대단지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도농복합형 행정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현재 사용하는 행정동명은 1957년 행정운영동 축소에 따라 효천면(孝泉面)과 덕남동(德南洞)의 이름을 따서 효덕동(孝德洞)(孝德洞)의 명칭이 처음 사용되었으며, 효천면은 효우동면과 도천면이 합해진 구역을 관할했었고 덕남동은 당시 진월출장소 관할의 법정동명이었다. 효덕동(孝德洞)의 연혁을 살펴보면, 원제·노대·구암등지에 고인돌이 분포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후기에는 이 지역이 광주군 효우동(孝友洞)면에 속했으며, 당시 이곳에는 진제(眞堤), 노대곡(老大谷), 덕남촌(德南村), 옹기(甕器)마을이 있었으며, 구한말(舊韓末)에 효우동면의 노대, 진제, 덕남, 점촌, 구암리와 도천면의 월전리가 이 지역에 속했다. 1914년4월1일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광주군 효천면의 진월리, 행암리 노대리, 덕남리가 되었으며, 당시 효우동면 중 진제 점촌 구암리 일부와 도천면 월전리가 합해져 진월(眞月)리가 되고 진제(眞堤)와 월전(月田)에서 이름을 땄으며, 행정(杏亭) 구암(龜岩:감바위) 대동(大洞:큰골)도동(都洞) 동네로 이루어진 행암(杏岩)리는 행정과 구암에서 이름을 땄다. 1935년4월1일 효천면(孝泉面)과 지한면(池漢面)이 합해진 효지면 (孝池面)의 진월, 행암, 노대, 덕남리가 되었다. 1935년10월1일 광주읍이 광주부(光州府)로 승격되어 광주군과 독립되면서 광주군의 나머지 지역은 광산군(光山郡)으로 개칭됐고, 이때 이 지역은 광산군 효지면에 속하였다. 1955년7월1일 광주시의 권역확장에 따라 광산군의 효지면, 석곡면, 서방면, 극락면이 광주시에 편입되면서 진월출장소(眞月出張所) 관할의 진월동 노대동 덕남동 행암동이 되었으며, 1957년12월2일 광주시의 122개동이 51개 행정운영동으로 축소 조정되면서 4개 법정동을 관할하는 "효덕동(孝德洞)"이 설치되어 현재 명칭이 처음 사용되었다. 1961년3월 1일 출장소제 실시에 따른 남부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73년7월1일 구제(區制) 실시로 남부, 서부, 지산출장소를 관할한 서구(西區)에 속하였다. 1986년11월1일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되고, 1995년1월1일 광주광역시로 명칭변경된 이후 1995년3월1일 서구에서 남구(南區)가 분구되면서 "광주광역시 남구 효덕동"이 되었다. 2021년 7월 26일 행정복지센터의 기능 강화를 위해 진월동을 분동시켰다.
  • 지역특성
    • 전남의 서남부 지역을 연결하는 국도 1호선이 동의 중심부를 관통하고 있으며 제2순환도로를 비롯한 광주대와 전남 화순군을 연결하는 도로의 발달 등 사통팔달의 교통요충지이다.
    • 그린벨트 지대인 노대, 덕남, 행암동 등 농촌지역과 더불어 행암동 대단지 아파트 중심으로 도·농 복합행정을 수행하고 있다.
    지역특성효덕동 면적 및 인구수(계/남/여), 세대수, 행정조직(통/반), 동직원현황에 대한 상세리스트 입니다.
    면적 인구 세대수 행정조직 동 직원
    현황
    5.7 16,131 7,733 8,398 7,498 22 127 13

송암동

  • 연혁
    • 송암동(松岩洞)은 금당산(304m)에서 서쪽으로 솔멧재를 건너 원추형인 화방산(202m)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背山으로 원제마을 뒷산으로부터 발원하여 서류(西流)하는 대촌천(大村川)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다. 동명(洞名)의 유래는 1957년 송하동(松荷洞)과 임암동(林岩洞)의 이름을 따서 송암(松岩)이라 칭했다. 송암동(松岩洞)의 연혁을 살펴보면 입하마을에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에 이지역은 광주군 효우동면에 속했는데 당시 이곳에 송산(松山;솔메), 가산(佳山), 도동(都洞;독골), 임정(林亭;들머리), 입암(笠岩;갓바위)마을이 있었고, 구한말에는 효우동면의 도동, 가산, 임정, 대동(大洞;큰골), 입암, 행정(杏亭), 입하(立荷), 일성(日成), 호암(虎岩;범바우), 송산리가 있었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효우동면중 송산, 일성, 입하,호암, 도동리의 일부가 합해져 송산(松山), 입하(立荷)로부터 광주군 효천면 송하리(松荷里)가 되고, 효우동면중 입암, 가산, 임정, 도동리와 선도(船道)면중 회산(懷山)리, 유등곡(柳等谷)면중 광석(光石), 내동(內洞)리 일부가 합해져 임정(林亭)과 입암(笠岩)으로부터 광주군 효천면 임암(林岩)리가 되었다. 1935년 4월 1일 효천면과 지한면(池漢面)이 병합되어 효지면(孝池面)송하리(松荷里)와 임암리(林岩里)가 되었다가 같은해 10월 1일 광주군 광주읍이 광주부(光州府)로 승격되어 독립함에 따라 나머지 지역이 광산군으로 개칭됨으로써 광산군 효지면 관할이 되었다. 1955년 7월 1일 광주시역의 확장에 따라 광산군 효지면이 광주에 편입됨과 동시에 광주시 진월출장소(眞月出張所)관할 송하동과 임암동이 되었다. 1957년 12월 2일 광주시의 122개동을 51개 운영동으로 축소함에 따라 송하, 임암 2개동을 관할하는 송암동(松岩洞)(松岩洞)이 되어 이때부터"송암동(松岩洞)(松岩洞)"의 호칭이 시작되었다. 1961년 3월 1일 출장소제 실시에 따라 남부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구제(區制)실시로 남부, 서부, 지산출장소를 통합한 서구 에 속하였으며, 1995년 3월 1일 서구에서 분구되면서 광주광역시 남구 송암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 지역특성
    • 전남 서남부의 10개 시군과 광주를 연결해주며, 대단위 차량정비업체 중심의 송암공단이 조성되어 있다. 특히 도심철도 이설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효천역과 송정역간의 철도개설이 이루어졌으며, 제 2순환도로가 완공되면서 전남과 광주를 잇는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관내 행암동과 임암동 일대가 개발되어 신흥주택주거지역인 효천지구가 조성되어, 많은 인구가 유입되었으며, 이러한 기반을 토대로 산업단지와 주거지역이 결합된 역동적인 동으로 변모하고 있다.
    지역특성송암동 면적 및 인구수(계/남/여), 세대수, 행정조직(통/반), 동직원현황에 대한 상세리스트 입니다.
    면적 인구 세대수 행정조직 동 직원
    현황
    6.89

    21,489

    10,385 11,104 8,592 34 151 13

대촌동

  • 연혁
    • 대촌동(大村洞)은 동쪽으로 건지산(乾芝山;300m), 정광산(淨光山;354m), 송학산(松鶴山;208m)등 비교적 높은 산들이 주변에 솟아 있어 낮은 구릉지대를 형성하고 서쪽과 남쪽으로 극락강(極樂江)과 지석천(砥石川)이 흐르며 중앙의 대촌천(大村川)을 따라 비옥한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다. 동명의 유래는 본래 광주군 지역의 유등곡면(柳等谷面), 칠석면(漆石面), 대지면(大支面), 계촌면(桂村面)의 4개면이 1914년 일제시대 행정구역개편에 의하여 통합되고 대지면과 계촌면의 이름을 따서 대촌면(大村面)이라 하였던 것이 시초이다. 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극락강과 대촌천변의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고인돌과 집단주거지등 선사시대 유물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원시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현 양과동지역에 양과부곡이 있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광주군 서면향목의 유등곡리, 대지리, 칠석리, 계촌리 등이 구한말에 면으로 바뀌었던 것이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개편으로 통합되어 대촌면이 되었다. 이때 대촌면은 오늘날의 행정구역과 같은 양과리·이장리·원산리·압촌리·지석리·도촌리·칠석리·대지리·석정리·화장리·월성리·양촌리·승촌리·구소리·신장리등 15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57년 11월 6일 전라남도 광주시에 편입되어 리(里)가 동(洞)으로 바뀌었고 그 해 12월 2일에 대촌출장소를 설치하여 15개동을 송석동(松石洞)·등룡동(登龍洞)·학승동(鶴昇洞)으로 나누어 운영하였으나 1963년 1월 1일 광산군 대촌면으로 다시 재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1일 광산군이 광주직할시로 흡수되어 광주직할시 광산구 대촌출장소로 바뀌었다가 1995년 1월 1일 광주광역시 광산구로 변경되었다가 1995년 4월 20일 자치구간 경계조정에 따라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 지역특성
    • 광주광역시 남서단에 위치하는 원예중심의 근교 복합 영농지역으로 우리구 전면적의 58%(35.28㎢)를 차지하면서 개발제한구역이 89%인 특수지역이며, 무형문화제 제33호 고싸움놀이, 포충사, 지산재 등 문화유산이 풍부하고 충효 · 애향 · 협동 정신이 강하며 사회경제적 개발 잠재력이 풍부한 지역이다.
    지역특성대촌동 면적 및 인구수(계/남/여), 세대수, 행정조직(통/반), 동직원현황에 대한 상세리스트 입니다.
    면적 인구 세대수 행정조직 동 직원
    현황
    35.4 6,295 3,117 3,178 3,288 43 11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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